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3세 (문단 편집) === 즉위 === 이전 표트르는 [[7년 전쟁]] 중 자기 입으로 '''적국인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에게 군사기밀을 넘기겠다'''는 등의 실언을 여러 차례 하면서 민심까지 잃어버렸다. 여하간 1761년 12월 25일,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자 표트르 3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그는 즉위한 직후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그만둔다'''는 폭탄 선언을 내뱉었다. [[7년 전쟁]] 문서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 시점에서 러시아-[[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프랑스 왕국|프랑스]]-[[스웨덴]]으로 연결되는 4국 동맹은 독일 지역 지상전에서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사실 전쟁초반 독일 전역에서 로스바흐에서 참패하고 주전장을 식민지로 시선을 돌렸으나 캐나다, 인도 등지에서 영국에 완전 발렸다.] 프로이센의 최대 요새인 콜베르크[* 현재의 폴란드 코워브제크(Kołobrzeg). 이곳은 단순히 최대 요새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왜냐하면 항구 도시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제국군의 최대 약점은 보급로가 너무나 길다는 것인데, 항구도시를 점령하면 해상으로 빠르고 대규모의 배급이 가능해져 보급 문제가 해결된다.]가 [[러시아 제국군]]에게 함락되었고,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은 지상전에서 프로이센에 현금 지원을 하다 그마저도 끊긴 지라[* 영국이 유럽 지상전에 나서지 않은건 아니다. [[조지 2세]]의 3남 컴벌랜드 공작에게 원정군을 맡겼다가 실패하자 친척이자 프로이센군의 장성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 영국군을 맡기기도 했다. 친척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과 헤센-카셀 방백국도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동맹이었다.] 러시아 제국군의 우세가 여전했다. 워낙 전쟁사에 황당하고 전무후무한 일이며, 심지어 표트르 3세는 단순히 전쟁을 중단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프로이센에 2만명에 달하는 지원군까지 보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그저 표트르 3세의 빠심으로 항복 받아낼 일만 남은 전쟁을 엎었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것은 러시아 쪽 연구를 무시한 사례에 불과하다. 일단 러시아 제국군의 보급선이 매우 길어서 전쟁 초기에는 이겨도 후퇴한게 옳았다는 판단이고 1760년 러시아 제국군이 [[베를린]]을 함락하긴 했는데 역시 후방위협 때문에 금방 후퇴했다. 정확히는 베를린 시장에게서 사례금을 받고 약탈은 면제했다. 대신 [[호엔촐레른 가문]]의 별궁이 모여있는 [[포츠담]]은 베를린의 바깥이므로 철저히 약탈했다. 왕족들은 미리 소식을 듣고 피신해서 잡지 못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병력을 잃는 것보단 차라리 땅을 잃는 것을 선호해 아까운 병력을 수비에 쓰지 않았고, 1760년 상황이 최악이긴 했는데 1761년엔 [[황제군|오스트리아군]]을 조금씩 밀어내서 조금 호전되는 추세였다. 프랑스는 유럽 지상전에서 로스바흐 전투 후에 거의 [[제2차 세계 대전]] 마냥 도움이 안됐고, 스웨덴도 전쟁 후반 소극적인건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처럼 많은 손해가 누적되어서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제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러시아 제국과 함께 참전)-[[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7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전쟁으로 재정이 파산 직전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러시아의 보급까지 책임져야 했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로 파견온 러시아 제국군이 본국이 워낙 멀어서 항상 보급 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7년 전쟁 말기에는 재정이 나빠진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제국군에게 보급을 제대로 못해주면서 러시아 제국군이 항의하여 보급 지원 문제로 러시아 장교들과 오스트리아 간의 갈등도 심해진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옐리자베타가 죽어가던 당시엔 [[슐레지엔]]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으로, 동맹이 성사되어서 봄이 되면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를 공격할거란 희망에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문서에도 나오지만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조너선 듈(Jonathan Dull)과 같은 근대사학자들의 최근 견해에 따르면, 표트르 3세가 외교상으로 실용적인 판단을 했다는 견해가 중론이다. 1762년 러시아가 패색이 짙어진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했을 때 프로이센이 완전히 패망할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이렇게 되면 프로이센은 당시 폴란드처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당해 과거의 패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프로이센이 몰락한다는 것은 곧 중부유럽에서 오스트리아가 단일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은 더 나아가 유럽 대륙의 힘의 균형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문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표트르 3세는 러시아군이 직접 베를린까지 진격하는 것보다는 콜베르크와 같은 북독일의 거점만을 장악해 중부유럽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면서도, 프로이센의 패권은 어느 정도 유지시켜 오스트리아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중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표트르 3세가 왜 희대의 등신이라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후술하듯이 프로이센과의 전쟁만 그치고 러시아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걸 ''''정말 독일에 대한 우호심 하나만으로 거의 100퍼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걷어찬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화된 상황에서 마침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으니 전쟁에서 빠질 핑계로는 충분했다. '''문제는 협상의 내용이 패전국이나 내걸 법한 조건이었다.''' 사실 옐리자베타 시절에도 러시아는 7년 전쟁에서 이겨봐야 얻을 게 별로 없다는 이유로 개전 초에 내부에서 반대가 상당했고 러시아도 참전했을 때 많은 병력과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계속 전쟁을 수행한 것인데, 문제는 표트르 3세가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배상금도 안받고 돌려주고 병력까지 대여해줄 것을 제의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가 얼쑤하고 이 제의를 받아들인 건 당연지사. 러시아가 물러나자 스웨덴도 판세가 나가리가 된 걸 보고 프로이센과 강화했다.[* 스웨덴 왕비 [[루이제 울리케]]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인 영향도 있었다.] 이러한 황제의 독단적인 결정은 귀족들과 군인들의 반발을 크게 불러왔다. 황제 개인으로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호감을 표하고 싶었다면, 점령한 영토는 챙기고 병력과 자금만 지원해주는 정도로도 자살을 고민하던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충분했다. 이랬으면 되려 소모적인 전쟁에서 적당한 이득을 챙기고 스웨덴을 부추겨 먼저 발을 빼는 동시에 이웃 오스트리아와 대륙 건너 프랑스의 뒷통수를 제대로 갈겨주는 통쾌한 엔딩이 되었겠지만... 오랜 시간을 투자한 전쟁에서 다짜고짜 자기 배를 자기가 가르더니 그 안에 든 걸 프로이센에게 통째로 넘겨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꼴이 된 것이다. 흔히 역사적 사건을 해석할 때 '그냥 그 인물이 어리석고 무능해서 그랬다.'라는 해석은 대놓고 하지는 않기 마련인데, 표트르 3세의 경우 저 해석이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이유가 바로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행동 때문이다. 거기다 표트르 3세는 [[정교회|러시아 정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성직자들에게 [[개신교]]의 목사들처럼 하고 다닐 것을 강요하는 등 국가 권력의 중요한 축인 교회마저 적으로 돌려버렸으니 실각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거기에 농노들이 전쟁으로 인한 징병과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표트르 3세는 전통적인 귀족의 권리를 지키시겠다고 그들을 잔혹하게 진압한 것은 덤이었다. 어찌보면 [[감탄고토|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는 [[독일/문화|독일식]] 근대 궁정문화를 강요해서 불만을 샀으면서 백성들에게는 누구보다도 봉건 러시아 귀족스러운 짓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러시아의 모든 군인들과 평민들, 귀족들, 성직자들은 모두 멍청한 황제에게 분노했고 심지어 멍청한 남편과 달리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어를 배우는 등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서 러시아 귀족들의 호감을 사고 있던 독일인인 아내(훗날 [[예카테리나 2세]]) 또한 [[분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